Summilux 35mm로 담은 한적한 여름길. 이런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렌즈의 시작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주미룩스 35mm로 촬영한 어느 한적한 풍경길. 이런 사진을 찍을 때마다 “이 렌즈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궁금했습니다.
M10-R로 사진 찍다가 문득 렌즈에 새겨진 ‘Summilux’라는 글씨를 한참 들여다봤습니다.
주미룩스(Summilux). 주미크론(Summicron). 엘마(Elmar). 이 이름들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요? 그냥 멋있어 보이려고 지은 이름일까요? 아니면 뭔가 의미가 있을까요?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 그리고 알게 됐죠. 이 이름 하나하나에 라이카의 역사가, 광학 기술의 진화가, 그리고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 설계자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을요.
오늘은 그 시작점으로 돌아가 봅니다. 1930년대 독일 베츨라의 작은 공장에서 시작된 M 렌즈의 이야기를요.
🏭 1. 1930년대 베츨라, 모든 것이 시작된 곳
라이카의 이야기는 1913년 바르낙이 만든 ‘우르라이카(Ur-Leica)’ 프로토타입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1925년, 그 시제품을 바탕으로 한 상용 모델 ‘라이카 I(Leica I)’이 세상에 등장했죠. 하지만 이때는 렌즈가 카메라에 고정된 형태였죠. 렌즈를 바꿀 수 없었습니다.
1920~30년대 라이카의 시작을 보여주는 초기 Leica I와 Elmar 50mm.
변화의 시작은 1930년 Leica I(Model C)에서였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교환식 렌즈 시스템이 도입됐고, 1932년 Leica II에서 레인지파인더가 결합되며 완성도를 높였죠. 이제 사진가들은 하나의 카메라에 여러 렌즈를 바꿔가며 쓸 수 있게 됐습니다.
문제는 렌즈였습니다. 당시 렌즈 기술은 대형 카메라용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35mm 소형 카메라에 맞는, 작으면서도 성능 좋은 렌즈를 만드는 건 완전히 새로운 도전이었죠.
여기서 등장한 사람이 ‘막스 베렉(Max Berek)’입니다.
👨🔬 2. 막스 베렉, 라이카 렌즈의 아버지
막스 베렉은 1912년 라이카에 입사한 광학 설계자입니다. 처음엔 현미경 렌즈를 설계하다가, 카메라 렌즈 개발에 뛰어들었죠.
그의 첫 작품이 바로 ‘엘마(Elmar)’입니다.
Leitz Elmar 50mm f/3.5는 라이카 교환식 렌즈 시스템을 실질적으로 완성시킨 초기 모델입니다. 1930년대 베츨라의 공방에서 만들어진 이 작은 렌즈가, 이후 주미크론과 주미룩스로 이어지는 라이카 광학 설계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1930년대 초반에 출시된 엘마(Elmar) 50mm f/3.5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렌즈였습니다. 테사형 4매 3군 구조를 기반으로,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해상력을 보여줬죠.
“엘마(Elmar)”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정확한 유래는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건 Ernst Leitz Wetzlar의 약자를 조합했다는 이야기입니다. E(Ernst), L(Leitz), Mar(Wetzlar의 일부)를 합쳐 Elmar가 됐다는 거죠. 렌즈 이름에 회사의 정체성을 새겨 넣은 겁니다.
엘마는 라이카의 표준 렌즈가 됐습니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수많은 사진가들이 엘마로 세상을 기록했죠.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초기 작품 중 일부도 엘마로 촬영됐다고 합니다.
🎯 3. 주미크론의 등장, 새로운 기준을 세우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진가들의 요구가 달라졌습니다. 더 밝은 렌즈가 필요했죠. f/3.5로는 실내나 어두운 환경에서 촬영하기 어려웠으니까요.
라이카는 f/2.0 렌즈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밝게만 만들면 안 됐습니다. 화질도 유지해야 했고, 크기도 적당해야 했죠.
1953년에 개발된 Summicron 50mm f/2는 이듬해 출시된 Leica M3와 함께 본격적으로 세계적인 표준 렌즈가 되었습니다.
“주미크론(Summicron)”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흥미롭습니다. Sum은 라틴어로 ‘최고(maximum)’를 의미하는 ‘summus’에서 왔고, micron은 ‘작다’는 뜻의 그리스어입니다. 즉, “최고의 성능을 작은 크기에 담았다”는 의미죠.
실제로 주미크론은 당시 기준으로 놀라운 렌즈였습니다. f/2.0이라는 밝기에도 불구하고 개방 조리개부터 날카로운 해상력을 보여줬거든요. 초기 Summicron 50mm f/2는 7매 6군, 총 8매의 요소로 구성된 더블 가우스 계열 설계를 적용해 수차를 효과적으로 보정했습니다.
주미크론은 곧 라이카의 대표 렌즈가 됐습니다. 지금도 중고 시장에서 “주미크론 8엘리먼트”, “주미크론 Rigid” 같은 초기 버전들이 높은 인기를 끌고 있죠. 클래식한 렌더링 때문에요.
초기 Summicron 50mm 라인업. 침동형부터 Rigid, Dual Range까지 이어진 1950~60년대의 대표 설계들.
🌟 4. 주마론과 엘마릿, 다양성의 시작
주미크론이 성공하자 라이카는 다른 화각과 조리개 값의 렌즈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마론(Summaron)’은 f/2.8 렌즈에 붙는 이름이었습니다. 주미크론보다 한 스톱 어둡지만, 그만큼 컴팩트하고 가벼웠죠. 35mm f/2.8 주마론은 스트리트 포토그래퍼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Summaron 35mm f/2.8. 라이카가 50mm 중심에서 광각 영역으로 확장하던 시기의 대표 렌즈입니다.
‘엘마릿(Elmarit)’은 f/2.8 렌즈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주마론과 비슷한 밝기지만, 조금 더 현대적인 광학 설계를 적용한 렌즈들이 엘마릿이라는 이름을 받았죠. 90mm f/2.8 엘마릿 같은 망원 렌즈들이 대표적입니다.
이름들이 헷갈리시나요?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라이카 M 렌즈 표 (가로 스크롤)
스크롤하여 전체 열을 확인하세요
렌즈명
조리개 값
특징
엘마 (Elmar)
f/3.5
라이카 초기 교환식 표준 렌즈
주미크론 (Summicron)
f/2.0
라이카의 표준, 균형 잡힌 성능
주마론 (Summaron)
f/2.8
컴팩트한 초기 광각/표준 계열
엘마릿 (Elmarit)
f/2.8
현대적 설계의 f/2.8 계열
📐 5. 광학 설계의 진화, 테사에서 더블 가우스로
렌즈 이름만큼이나 중요한 게 광학 구조입니다.
초기 엘마는 테사형 3군 4매 구조였습니다. 1902년 Carl Zeiss가 개발한 테사(Tessar)는 적은 매수로도 높은 해상력을 낼 수 있어 당시 소형 카메라 렌즈의 표준처럼 쓰였죠. 다만 조리개를 크게 열기에는 구조적 한계가 있었습니다.
주미크론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더블 가우스 계열의 7매 6군 구조를 채택했습니다. 더블 가우스는 중앙을 기준으로 대칭적인 배치를 이루기 때문에 수차 보정에 유리하고, 밝은 렌즈를 만들기에 적합한 구조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광학 설계 전문가는 아닙니다. 테사니 더블 가우스니 하는 용어들도 이번에 공부하면서 알게 됐어요. 하지만 이해한 만큼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테사 타입: 렌즈 매수가 적어 작고 가볍지만, 밝기를 높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더블 가우스: 구조가 더 복잡하지만, 밝으면서도 수차를 균형 있게 잡기 좋다.
초기 주미크론이 개방 조리개부터 날카로운 이유도 바로 이 더블 가우스 기반 설계 덕분입니다.
🔍 6. 왜 이름에 의미를 담았을까?
렌즈 이름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궁금했습니다. 왜 라이카는 이렇게 특별한 이름을 지었을까요? 그냥 “50mm f/2.0″이라고 불러도 되잖아요?
제 생각엔 정체성 때문인 것 같습니다.
1930~50년대는 카메라와 렌즈 산업이 급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수많은 회사들이 비슷한 스펙의 렌즈를 만들어냈죠. 그 속에서 라이카는 자신들의 렌즈가 단순한 ’50mm f/2.0’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겁니다.
주미크론은 그냥 f/2.0 렌즈가 아닙니다. 라이카의 철학이 담긴, 최고의 기술력으로 만든 렌즈죠. 그래서 특별한 이름이 필요했던 겁니다.
지금 제 카메라에 달린 주미룩스 35mm를 볼 때마다 느낍니다. 이건 단순한 렌즈가 아니라, 거의 100년에 걸친 라이카의 역사가 담긴 결과물이라는 걸요.
🎬 7. 레오 막스 베르텔, 또 다른 거장
막스 베렉 이야기만 하고 넘어가면 섭섭합니다. 라이카 렌즈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있거든요.
레오 막스 베르텔(Leo Max Bertele)입니다.
레오 베르텔이 만든 전설적인 조나 렌즈입니다. 당시엔 정말 혁신적인 설계였다고 하더군요
베르텔은 원래 Carl Zeiss에서 일하던 설계자였습니다. 그가 만든 조나(Sonnar) 렌즈는 전설이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베르텔은 스위스 Wild Heerbrugg에서 항공촬영용 렌즈인 Aviogon 등을 개발했죠.
베르텔은 라이카와 직접적인 고용 관계는 없었지만, 그의 렌즈 설계 철학이 라이카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바로 광학 설계 방법론이죠.
그는 수학적 계산과 실험을 통해 렌즈 성능을 체계적으로 개선하는 방법을 확립했습니다. 이 방법론이 나중에 주미룩스와 녹티룩스 개발의 기초가 됐다고 합니다.
📸 8. 실제 사진으로 보는 클래식 렌즈의 매력
이론 이야기만 하면 지루하죠. 실제로 이 렌즈들이 어떤 사진을 만들어내는지 보는 게 중요합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클래식 엘마나 초기 주미크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고 시장과 포럼에서 본 사진들을 보면, 이 렌즈들의 “룩(look)”은 확실히 독특합니다.
현대 렌즈처럼 완벽하게 날카롭진 않습니다. 개방 조리개에서 약간의 부드러움이 있죠. 콘트라스트도 낮은 편이고요. 하지만 그게 오히려 필름 같은 느낌을 만들어냅니다.
색 재현도 다릅니다. 현대 렌즈가 선명하고 강렬한 색을 보여준다면, 클래식 렌즈는 차분하고 자연스러운 색을 냅니다. “라이카 룩”이라고 불리는 그 특유의 감성이 여기서 나오는 거죠.
M9-P에 35mm 주미크론 4세대를 물려 찍은 사진이에요. 그 특유의 부드러운 느낌이 잘 살아있죠.
제가 주미크론 35mm f/2.0 (4세대)를 썼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M9-P에 물려서 찍었는데, 디지털인데도 필름 같은 느낌이 나더라고요. 지금 쓰는 주미룩스 35mm f/1.4 II는 훨씬 더 날카롭고 현대적이지만, 가끔은 그 부드러운 주미크론이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 9. M 마운트의 탄생과 표준화
1954년, 라이카는 새로운 카메라 라이카 M3를 출시했습니다. 여기서 “M”은 “Messsucher”(독일어로 레인지파인더)의 약자입니다.
한여름의 끝, 대구 불로동 고분군에서 1500년의 시간을 만났습니다.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고분과 ‘나홀로 나무’의 비현실적인 풍경, 그리고 과거의 왕국 너머로 보이는 현대 도시의 모습 속에서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라이카 M10-R의 느린 호흡으로 담아낸 아름다운 사진과 기록을 공유합니다.
예쁜 조각상에서 괴물 같은 성능의 카메라로. 핫셀블라드 X1D의 아름다운 실패부터 1억 화소 X2D 100C의 완성까지, X시스템의 진화 과정을 라이카 유저의 시선으로 낱낱이 파헤칩니다. 스펙 비교, 렌즈 가이드, 그리고 핫셀블라드를 선택해야 하는 진짜 이유를 확인해 보세요.
12편에 걸친 라이카 특별 시리즈의 마지막 여정. “나에게 라이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합니다. M9-P와의 5년, M10-R과의 2년. 수동 조작의 즐거움부터 사진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까지, 한 사진가의 모든 경험과 철학을 담아낸 진솔한 고백을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