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홍콩 느와르 영화 장면, 트렌치코트를 입고 양손에 권총을 든 남자 배우가 거리를 걷고 있다
| |

 🎧 1990년대 초반 홍콩 영화 전성기: 왜 한국 극장가는 홍콩 영화에 열광했을까

요즘 OTT(넷플릭스, 쿠팡플레이 등)와 블루레이를 통해 옛날 홍콩 영화를 시간날 때마다 한 편씩 보고 있습니다.

주윤발의 트렌치코트, 장국영의 미소, 이연걸의 쾌도난마식 액션. 이 모든 게 우리 청춘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그건 하나의 문화 현상이었고, 세대 전체의 취향을 바꿔놓은 거대한 물결이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 국내 극장가, 영화를 보기 위해 거리를 가득 메운 관객들과 건물 벽면의 대형 영화 포스터들
1990년대 초반 서울 극장가의 모습입니다. 거리를 가득 메운 관객들과 벽면을 뒤덮은 영화 포스터는 당시 극장 문화의 전성기를 보여줍니다.

지난 글에서 1990년 서울 극장가 TOP 10 흥행작을 살펴보며 <지존계상>이 7위에 올랐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당시엔 작은 파도 정도로 보였던 홍콩 영화의 존재감이었죠.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홍콩 영화는 말 그대로 한국 극장가를 점령했습니다. 오늘은 그 눈부셨던 시절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왜 그토록 홍콩 영화에 열광했고, 그 열풍은 어떻게 한국 영화 문화를 바꿔놓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1991~1994년, 한국 극장가에서 홍콩 영화 흥행 비중

먼저 놀라운 통계 하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1991년~1994년 서울 극장가 TOP 10 중 홍콩 영화 비중

  • 1991년: 10편 중 4편 (40%)
  • 1992년: 10편 중 3편 (30%)
  • 1993년: 10편 중 5편 (50%)
  • 1994년: 10편 중 2편 (20%)

할리우드가 여전히 강세였지만, 홍콩 영화는 거의 매년 30~50%의 점유율을 차지했습니다. 특히 1993년은 절반이 홍콩 영화였죠. 이건 단순한 흥행을 넘어선 문화 현상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건 이 수치가 서울 극장가만의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전국 단위로 보면, 비디오 대여점까지 포함하면, 홍콩 영화의 영향력은 이보다 훨씬 컸을 겁니다. 당시 동네마다 있던 비디오 대여점 진열대에는 홍콩 영화 섹션이 따로 있었을 정도니까요.

1990년대 비디오 대여점 진열대, 홍콩 영화 VHS 테이프들이 빼곡하게 꽂혀있는 모습
1990년대 비디오 대여점 진열대의 모습입니다. 홍콩 영화 VHS 테이프들이 빼곡하게 꽂혀있습니다. 당시 동네마다 있던 비디오 대여점에는 이렇게 홍콩 영화 섹션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극장 개봉을 놓친 관객들은 비디오로 홍콩 영화를 즐겼습니다.

🔥 왜 우리는 홍콩 영화에 열광했나

사실 냉정하게 보면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광동어로 말하는, 문화적 배경도 다른, 자막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영화들이 왜 이렇게 인기를 끌었을까요? 할리우드의 거대 자본과 기술력도 아니고, 유럽 예술 영화의 깊이도 아닌, 그저 홍콩에서 만든 대중 영화가 말입니다.

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그들의 영화는 ‘쿨’했거든요.

홍콩 느와르 영화 장면, 선글라스를 낀 주윤발이 불타는 달러 지폐를 들고 있고 배경에 흰 비둘기들이 날아가고 있다
불타는 지폐와 흰 비둘기, 그리고 선글라스. 존 우 감독으로 대표되는 홍콩 느와르 영화의 상징적 장면입니다. 돈보다 의리를 중시하고, 폭력마저 미학으로 승화시키는 이런 스타일이 당시 한국 관객들에게는 ‘쿨함’ 그 자체였습니다.

할리우드 영화가 보여주는 미국식 영웅주의나 개인주의와는 결이 달랐습니다. 홍콩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의리를 위해 목숨을 걸었고, 형제애를 위해 총을 들었으며, 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유교 문화권인 우리에게 훨씬 더 직관적으로 다가왔죠.

게다가 홍콩 영화 특유의 템포가 있었습니다. 빠르고, 화려하고, 과장되지만 어딘가 진지한. 존 우 감독의 슬로우 모션 총격전, 서극 감독의 현란한 무협 액션, 왕가위 감독의 감각적인 영상미는 당시 관객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영화적 체험이었습니다.

🎭 1991-1994년, 연도별 홍콩 영화 흥행작 정리

이제 본격적으로 그 시절을 연도별로 되짚어보겠습니다.

1991년: 폭발적 시작

주요 흥행작

  • <천녀유혼 2> – 서울 관객 45만 명
  • <도성풍운> – 35만 명
  • <종횡사해> – 32만 명
  • <황비홍> – 30만 명

1991년은 홍콩 영화 황금시대의 본격적인 막이 올랐던 해입니다. <영웅본색> 시리즈로 이미 한국에 발판을 마련한 홍콩 영화는, 이제 장르를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영화 천녀유혼의 한 장면, 장국영과 왕조현이 마주보며 애틋한 눈빛을 교환하고 있다
영화 <천녀유혼>의 한 장면입니다. 장국영(영채신 역)과 왕조현(소천 역)의 애틋한 눈빛이 인간과 귀신의 불가능한 사랑을 담아냅니다. 동양적 판타지와 로맨스가 결합된 이 영화는 1991년 서울에서만 45만 명을 동원하며 홍콩 판타지 영화의 매력을 한국에 각인시켰습니다.

프로듀서 서극이 만든 <천녀유혼> 시리즈는 동양적 판타지의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줬습니다. 장국영과 왕조현의 인간과 귀신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로맨스와 액션, 코미디를 절묘하게 버무려냈죠. 특히 2편은 1편의 인기를 이어받아 더 큰 흥행을 거뒀습니다.

이연걸 주연의 <황비홍>은 전통 무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었습니다. 유가협 감독의 안무는 와이어 액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이연걸은 일약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남아당자강”이라는 주제곡은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죠.

1992년: 다양성의 확장

주요 흥행작

  • <동방불패> – 서울 관객 58만 명
  • <소림사> – 40만 명
  • <첩혈쌍웅> – 38만 명

1992년은 홍콩 영화가 장르적으로 더욱 다채로워진 해였습니다.

서극 감독의 <동방불패>는 홍콩 무협 영화의 정점을 찍었습니다. 이연걸이 연기한 영호충과 임청하가 연기한 동방불패의 관계는 무협 영화에 새로운 차원을 더했죠. 화려한 와이어 액션과 검술 안무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영화 첩혈쌍웅의 한 장면, 피로 얼룩진 흰 셔츠를 입은 주윤발이 권총을 들고 있고 이수현이 그를 뒤에서 지탱하고 있다
영화 <첩혈쌍웅>의 클라이맥스 장면입니다. 주윤발(킬러 아룡 역)과 이수현(형사 이잉 역)이 피로 얼룩진 채 마지막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으로, 존 우 감독 특유의 비극적 미학이 극대화된 순간입니다. “의리와 배신, 그리고 숙명”이라는 홍콩 느와르의 핵심 정서를 한 프레임에 담아낸 명장면으로 평가받습니다.

존 우 감독의 <첩혈쌍웅>은 느와르 장르의 완성형이었습니다. 주윤발과 이수현이 연기한 두 킬러의 우정과 배신, 그리고 숙명은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존 우 특유의 슬로우 모션 총격전과 흰 비둘기는 이미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있었죠.

1993년: 절정의 해

주요 흥행작

  • <영웅본색 3> – 서울 관객 70만 명
  • <청사> – 55만 명
  • <천장지구> – 48만 명
  • <취권 2> – 42만 명
  • <동사서독> – 35만 명

1993년은 홍콩 영화가 한국에서 거둔 가장 화려한 성과의 해였습니다. TOP 10 중 5편이 홍콩 영화였고, 그중 <영웅본색 3>는 70만 명을 동원하며 전체 3위에 올랐습니다.

<영웅본색> 시리즈의 완결편인 3편은 주윤발 없이도 레온 카파이와 양조위가 시리즈의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비록 이전 작들만큼의 임팩트는 없었지만, 시리즈에 대한 팬들의 애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보여주는 흥행이었죠.

영화 취권 2의 한 장면, 성룡이 술 취한 듯한 자세로 상대방을 제압하며 코믹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영화 <취권 2>의 명장면입니다. 성룡이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자세로 상대를 제압하는 “취권” 특유의 무술 동작을 보여줍니다. 진지한 격투와 코믹한 표정이 절묘하게 결합된 이 장면은 쿵푸 코미디라는 장르의 정수를 보여주며, 유가량 감독의 안무와 성룡의 육체적 연기가 만들어낸 최고의 순간으로 평가받습니다.

성룡의 <취권 2>는 쿵푸 코미디의 진수를 보여줬습니다. 유가량 감독의 안무와 성룡의 육체적 연기가 만나 탄생한 마지막 대결 장면은 지금 봐도 놀랍습니다. 특히 성룡이 술에 취해 싸우는 장면은 쿵푸 영화사에 남을 명장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은 예술성까지 겸비한 작품이었습니다. 무협이라는 장르를 빌려 인간 내면의 고독과 사랑을 탐구한 이 영화는, 홍콩 영화가 단순한 오락을 넘어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1994년: 여운의 시작

주요 흥행작

  • <중경삼림> – 서울 관객 32만 명
  • <천룡팔부> – 28만 명

1994년부터는 조금씩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좋은 작품들이 나왔지만, 이전처럼 폭발적인 흥행을 만들어내진 못했죠.

영화 중경삼림의 편의점 장면, 경찰복 입은 양조위가 음료수를 마시고 왕비가 카운터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
영화 <중경삼림>의 상징적인 편의점 장면입니다. 경찰 663(양조위)이 매일 같은 시간에 들러 음식을 사고, 페이(왕비)가 카운터에서 그를 몰래 지켜보는 장면입니다. 왕가위 감독 특유의 감각적인 색감과 구도로 홍콩이라는 도시의 고독과 낭만을 포착한 명장면이며, “California Dreamin'”이 흐르는 이 시퀀스는 1990년대 홍콩 예술 영화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왕가위의 <중경삼림>은 감각적인 도시 영화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했습니다. 금성무와 양조위, 왕비, 임청하가 만들어낸 두 개의 사랑 이야기는 홍콩이라는 도시의 고독과 낭만을 완벽하게 포착했습니다. “California Dreamin'”이 흐르는 편의점 장면은 지금도 영화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죠.

💫 1990년대 홍콩 영화 스타들: 주윤발·장국영·이연걸·성룡

홍콩 영화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스타 시스템입니다. 90년대 초반 한국 청소년들에게 홍콩 배우들은 할리우드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주윤발: 쿨함의 아이콘

트렌치코트를 휘날리며 권총을 든 주윤발의 모습은 한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영웅본색>의 소마크 형, <첩혈쌍웅>의 킬러 아룡.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모두 의리을 동시에 갖춘 인물들이었죠.

당시 대학가에서는 주윤발 스타일의 트렌치코트가 유행했고, 그의 담배 물고 총 쏘는 자세를 따라 하는 젊은이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는 단순한 배우를 넘어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었습니다.

장국영: 동양적 미의 완성

1990년대 장국영의 흑백 초상 사진, 부드러운 미소와 우아한 눈빛
1990년대 장국영의 모습입니다. <천녀유혼>의 영채신, <아비정전>의 욱자, <패왕별희>의 정접이로 한국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그는 섬세하고 우아한 매력으로 특히 여성 팬들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배우이자 가수로서 한국에서도 앨범을 발매할 정도로 높은 인지도를 자랑했던 그의 미소는 홍콩 영화 황금시대의 상징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장국영은 또 다른 매력을 가진 스타였습니다. <천녀유혼>의 영채신, <아비정전>의 욱자, <패왕별희>의 정접이.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모두 섬세하고 우아한 매력을 지녔습니다.

특히 여성 팬들에게 장국영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그의 미소 한 번이면 극장은 탄성으로 가득 찼죠. 배우이자 가수였던 그는 한국에서도 앨범을 발매할 정도로 높은 인지도를 자랑했습니다.

이연걸: 무술의 화신

이소룡 이후 최고의 무술 배우로 평가받던 이연걸은 <황비홍> 시리즈와 <동방불패>로 한국에서도 확고한 입지를 다졌습니다. 그의 액션은 절도 있고 빠르며 아름다웠습니다.

특히 남자 관객들은 이연걸의 무술 실력에 열광했습니다. 당시 동네 태권도장마다 “이연걸처럼 되고 싶다”는 아이들이 넘쳐났을 정도였죠.

성룡: 코미디 액션의 대가

성룡은 조금 다른 포지션이었습니다. 80년대부터 이미 한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던 그는, 90년대 들어 <취권 2>, <용호풍운> 등으로 가족 영화 스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의 육체를 사리지 않는 액션과 코믹한 연기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았습니다. 특히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NG 장면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볼거리였죠.

🎬 장르별로 본 홍콩 영화의 매력

홍콩 영화가 이토록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장르의 다양성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홍콩 영화의 4가지 장르를 보여주는 콜라주, 느와르 액션, 무협 판타지, 쿵푸 액션, 예술 영화 장면들
1990년대 홍콩 영화의 장르별 대표 장면들입니다. 좌상부터 시계방향으로 범죄 느와르의 긴장감, 무협 판타지의 동양적 미학, 왕가위 스타일의 도시 감성, 쿵푸 액션의 육체미를 보여줍니다. 홍콩 영화는 이렇게 느와르, 무협, 쿵푸 코미디, 예술 영화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한국 관객들에게 새로운 영화적 체험을 선사했습니다.

느와르: 의리와 배신의 미학

존 우 감독으로 대표되는 홍콩 느와르는 독특한 매력을 지녔습니다. 단순히 범죄를 다루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인간의 의리를 이야기했죠.

<영웅본색>, <첩혈쌍웅>, <종횡사해>로 이어지는 존 우의 필모그래피는 ‘남자들의 로맨스’라 불렸습니다. 총격전 속에서도 형제를 지키려는 주인공들, 배신자에게조차 마지막 기회를 주는 의협심,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존심. 이런 요소들이 한국 관객들의 정서와 맞아떨어졌습니다.

특히 존 우 특유의 슬로우 모션 연출은 폭력을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담배를 물고 양손에 권총을 든 채 날아다니는 주인공, 흩날리는 지폐와 비둘기, 이 모든 게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죠.

무협: 동양 판타지의 정수

서극과 정소동으로 대표되는 무협 영화는 동양적 판타지의 진수를 보여줬습니다. 와이어를 이용한 날아다니는 액션, 검으로 적을 베는 쾌감, 무림의 의리와 복수.

<천녀유혼>, <동방불패>, <소오강호> 등은 김용과 고룡의 무협 소설을 영화로 완벽하게 구현했습니다. 특히 와이어 액션은 당시 한국 관객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죠. 사람이 저렇게 날 수 있다니, 검술이 저렇게 화려할 수 있다니.

무협 영화는 단순한 액션을 넘어 낭만을 담고 있었습니다. 강호의 의리,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 복수와 용서의 이야기. 이런 서사는 한국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쿵푸 코미디: 웃음과 액션의 조화

성룡과 원표로 대표되는 쿵푸 코미디는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장르였습니다. 화려한 무술 실력에 코믹한 상황이 더해지면서,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오락 영화가 탄생했죠.

<취권 2>의 마지막 대결, <방세옥>의 사자춤 장면, <취권>의 뱀권 대결. 이런 장면들은 지금 봐도 놀라운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특히 성룡의 경우 스턴트 없이 직접 모든 액션을 소화했다는 점에서 더욱 존경받았죠.

예술 영화: 깊이와 감각의 세계

왕가위 감독으로 대표되는 홍콩 예술 영화는 좀 더 지적인 관객층을 겨냥했습니다. 하지만 그조차도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는 게 놀라웠죠.

<아비정전>, <동사서독>, <중경삼림>, <타락천사>로 이어지는 왕가위의 필모그래피는 도시의 고독사랑의 불가능성을 탐구했습니다. 크리스토퍼 도일의 감각적인 촬영과 어우러진 이 영화들은, 홍콩 영화가 할리우드와는 다른 방식으로 예술성을 추구할 수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특히 <중경삼림>은 상업성과 예술성을 모두 잡은 작품이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이토록 신선하고 감각적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걸 증명했죠.

🇰🇷 홍콩 영화가 한국 영화에 끼친 영향

홍콩 영화의 열풍은 단순히 극장 매출에만 영향을 미친 게 아니었습니다. 한국 영화 산업 전체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2001년 영화 친구 포스터, 유오성과 장동건을 포함한 네 명의 남자가 달리고 있다
2001년 개봉한 <친구>. 홍콩 느와르가 한국적 정서로 변주된 대표적 결과물입니다.

액션 영화의 진화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영화에서 나타난 세련된 액션 연출은 홍콩 영화의 직접적인 영향이었습니다. <비트>, <넘버 3>, <친구> 같은 느와르 영화들은 존 우와 오우삼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죠.

특히 액션 안무의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이전까지 한국 영화의 액션은 투박하고 현실적이었다면, 홍콩 영화를 경험한 이후에는 훨씬 더 세련되고 스타일리시해졌습니다.

장르 영화의 발전

홍콩 영화는 한국 영화계에 장르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그전까지 한국 영화는 주로 멜로드라마나 사회 고발물 위주였다면, 홍콩 영화 이후에는 다양한 장르가 시도되기 시작했습니다.

<쉬리>, , <친구> 같은 90년대 후반 한국 블록버스터들은 모두 홍콩 영화가 증명한 ‘장르 영화도 흥행할 수 있다’는 교훈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스타 시스템의 정립

홍콩의 스타 시스템도 한국에 영감을 줬습니다. 배우 개인의 카리스마와 매력을 극대화하는 방식, 팬덤을 형성하는 전략 등은 이후 한국 영화계가 벤치마킹한 부분이었죠.

특히 남자 배우의 이미지 메이킹에서 홍콩의 영향이 컸습니다. 주윤발식의 쿨한 카리스마, 장국영식의 섬세한 매력은 90년대 후반 한국 남자 배우들의 롤모델이 되었습니다.

📉 1995년 이후 홍콩 영화 쇠퇴의 이유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었습니다. 1995년부터 홍콩 영화의 기세는 눈에 띄게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1997년 반환 이슈

1997년 7월 1일 홍콩 반환식, 중국 국기와 영국 국기가 나란히 걸려있고 양국 관계자들이 단상에 서 있다
1997년 7월 1일 홍콩 반환식의 모습입니다. 156년간의 영국 통치가 끝나고 홍콩이 중국 주권 아래로 돌아간 이 순간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을 넘어, 홍콩 영화 산업 전체의 운명을 바꾼 분기점이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홍콩의 중국 반환이었습니다. 1997년 7월 1일, 홍콩이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영화 산업에도 큰 변화가 생겼죠. 많은 감독과 배우들이 할리우드로 진출했고, 홍콩 영화 특유의 자유로운 창작 환경이 점차 사라졌습니다.

존 우는 할리우드로 갔고, 오우삼도 활동을 줄였습니다. 주윤발과 이연걸 역시 할리우드 진출을 시도했죠. 홍콩 영화의 중심축이었던 인재들이 빠져나가면서, 산업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영화의 부상

또 다른 이유는 한국 영화의 성장이었습니다. 90년대 후반 <쉬리>, 같은 한국 블록버스터가 등장하면서, 관객들은 더 이상 홍콩 영화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홍콩 영화가 보여준 가능성을 한국 영화가 계승하면서, 정작 홍콩 영화는 한국 시장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죠.

장르의 한계

홍콩 영화 특유의 과장된 연출과 설정이 점차 식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와이어 액션도, 슬로우 모션 총격전도, 처음엔 신선했지만 계속 반복되니 새로움이 사라졌죠.

게다가 90년대 후반 들어서는 홍콩 영화 자체의 완성도도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황금기의 명작들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게 질이 떨어지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1990년대 홍콩 영화 전성기가 남긴 것

돌이켜보면 1991년부터 1994년까지의 홍콩 영화 열풍은 한국 영화사에서 매우 독특한 시기였습니다. 할리우드도 아니고, 유럽도 아닌, 아시아의 대중 영화가 이토록 큰 사랑을 받았던 적은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으니까요.

그 시절 홍콩 영화는 우리에게 단순한 오락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그건 문화적 동질감이자 아시아에 대한 자부심이었습니다. 할리우드가 아니어도, 우리와 비슷한 얼굴을 가진 배우들이,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정서로, 이토록 멋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걸 홍콩 영화가 증명했으니까요.

주윤발이 트렌치코트를 휘날리며 권총을 들었던 모습, 장국영이 애틋하게 웃던 미소, 이연걸이 검을 휘두르던 절도 있는 동작, 성룡이 술에 취해 웃으며 싸우던 장면. 이 모든 것들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그게 단순히 영화가 아니라 우리 청춘의 한 페이지였기 때문일 겁니다.

홍콩 영화의 황금시대는 끝났지만, 그 시절이 남긴 유산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한국 영화가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홍콩 영화가 보여준 가능성과 영감이 큰 역할을 했으니까요.

다음에는 90년대 중후반, 홍콩 영화가 물러간 자리를 채운 한국 영화 르네상스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Similar Posts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