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주왕산의 하루, 구름 속을 지나 빛으로 내려오다 | Leica M10-R 스냅
새벽 여섯 시, 대구를 출발했습니다. 이른 시간이라 도로는 한산했고, 공기는 차분했습니다. 차창 너머 하늘은 잔쯕 흐림이었죠. 두 시간 정도 달려 주왕산 국립공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꽤 많은 등산객들이 눈에 띄였습니다.
전날 비가 내렸는지 땅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가을 특유의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죠. 그 공기만으로도 오늘 산행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를 때는 구름이 낮게 깔려 시야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희미한 빛이 나뭇잎 사이로 번질 때마다 어딘가 깊은 곳으로 초대받는 듯한 기분이 들더군요. 사진 찍기 좋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이런 날의 주왕산은 오히려 더 조용하고 진했습니다.
내려올 때쯤 하늘이 완전히 열렸습니다. 회색빛으로 덮여 있던 산이 갑자기 빛을 머금은 듯 환해졌어요.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 달라지는 풍경. 그래서 산은 늘 사진보다 눈으로 오래 남습니다.
🅿️ 주차장 도착

주왕산 입구 국립공원 표지석 앞에 섰습니다. 새벽 여섯 시에 대구를 출발해 두 시간 정도 달렸는데, 도착하니 이미 생각보다 많은 등산객들이 눈에 띄더군요.
길 건너편으로 작은 상점들이 보이고, 하나둘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주차장 한쪽에는 귀여운 양 조형물도 서 있었습니다. 하늘은 여전히 흐렸지만 바람이 맑아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 상점가를 지나

작은 상점들 사이를 걸었습니다. 버섯, 더덕, 약초를 파는 가게마다 특유의 향이 났죠. “대구수퍼”라는 간판이 정겹고, 가게 앞에 수북이 쌓인 건나물들이 가을을 실감하게 했습니다.
길바닥에는 비가 남긴 물기가 반짝거렸고, 그 위를 걷는 발소리마다 작은 리듬이 생겼습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몇몇 등산객들이 간식을 고르며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 주봉 탐방로 입구

‘주봉 탐방로’라는 나무 간판 아래를 지나며 산행이 시작됐습니다. 간판 양옆으로 국립공원 안내판이 서 있고, 그 너머로 흙길이 숲속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전날 내린 비 때문인지 땅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물기 어린 흙길을 밟을 때마다 신발 밑창이 부드럽게 눌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비 온 뒤 숲의 색감은 언제나 한층 진하고 깊습니다. 나뭇잎의 초록빛이 더 선명해 보이고, 흙의 냄새도 더 또렷하게 느껴졌습니다.
간판 너머로 보이는 길이 어딘가 깊은 곳으로 이어질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 안개 속 오름길

길은 점점 가팔라졌습니다. 나무 계단이 이어지고, 안개는 더 두꺼워졌습니다. 나무줄기들이 희미하게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앞서가던 등산객들의 말소리도 점점 멀어지고, 대신 내 숨소리와 신발이 흙을 밟는 소리만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가끔 나뭇가지 사이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 때마다 어딘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런 구간에서는 카메라보다 걸음이 먼저입니다. 시야가 제한된 만큼 발밑과 호흡에 더 집중하게 되더군요. 안개 속 숲길 특유의 고요함과 촉촉한 공기가 오히려 산행에 집중하게 만들었습니다.
계단 옆으로 떨어진 낙엽들이 젖어 있었고, 그 위를 밟을 때마다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졌습니다.
☁️ 운해

한참을 오르다 산 중턱 어딘가에서 시야가 트였습니다. 하얀 구름이 계곡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운해가 바다처럼 흘러가고, 그 위로 주왕산의 능선들이 섬처럼 떠 있었습니다. 소나무 가지 너머로 펼쳐진 그 풍경은 마치 수묵화 한 폭을 보는 듯했습니다.
구름은 천천히 움직이며 계곡의 형태를 드러냈다 감췄다를 반복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숨소리조차 멈추고 그저 눈앞의 장면에 집중하게 되더군요.
셔터를 몇 번 눌렀습니다. 하지만 이 풍경의 깊이와 공기의 차가움, 그리고 바람이 구름을 밀어내는 느낌은 사진으로 다 담기 어려웠습니다.
잠깐이었지만 강하게 남은 장면이었습니다. 셔터를 누른 뒤에도 손끝이 오래 떨렸습니다.
⛰️ 주봉 정상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안개가 몰려와 멀리까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빽빽히 둘러싼 나두들로 인해 기대했던 조망은 없었지만, 바람이 좋았습니다.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준비해온 보온병을 꺼내 컵라면 하나를 끓였습니다. 김이 올라오는 순간, 따뜻한 냄새와 함께 오르며 쌓였던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정상의 뷰가 없어도 괜찮았습니다. 오히려 안개와 나무에 둘러싸인 이 고요한 공간이 더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손에 쥔 라면 컵의 온기가 차가운 손을 녹여주었고, 첫 입을 떠 넣을 때의 그 맛은 어떤 레스토랑에서도 느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한 풍경은 없었지만, 그 자리가 오히려 더 좋았습니다.
🍂 숲길과 계곡

계곡물이 돌 사이를 흐르며 만드는 소리는 마음의 긴장감을 풀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가끔 물가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으며 흐르는 물을 바라보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가을의 색이 곳곳에서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노란빛 잎사귀가 바닥에 흩어져 있고,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물 위에 반짝였습니다.
햇살이 점점 짙어지며 숲속 공기까지 따뜻해졌습니다. 오를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했습니다.
🚶 하산길

내려오는 길은 한결 여유로웠습니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가 일정한 리듬으로 들렸고, 그 소리를 따라 걷다 보니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오를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낙엽이 쌓인 길 옆으로 붉게 물든 작은 단풍나무가 있었고,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길 위에 그림자를 만들었습니다.
발걸음은 가벼워졌지만, 급하게 내려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고요한 숲길을 조금 더 천천히 느끼고 싶었습니다.
햇살이 점점 짙어지며 숲속 공기까지 따뜻해졌습니다. 오를 때의 차가운 안개는 완전히 사라지고, 이제는 가을 햇살이 등을 따뜻하게 감싸주었습니다.
💧 용연폭포

멀리서 들리던 물소리가 점점 커졌습니다. 용연폭포 앞에 섰을 때, 그 수량과 힘에 잠시 말을 잃었습니다.
두 단으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공기를 가득 채우고, 물안개가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폭포 앞 전망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사람들의 감탄사조차 물소리에 묻혀 묘하게 어우러졌습니다.
폭포 아래 에메랄드빛 소(沼)는 깊어 보였고, 물줄기가 떨어지는 곳에서는 하얀 거품이 끊임없이 솟아올랐습니다. 전날 내린 비 덕분인지 수량이 풍부해 평소보다 더 웅장한 모습이었습니다.
가을 단풍과 어우러진 폭포는 자연이 만든 한 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카메라를 꺼내 들었지만, 그 소리와 물안개의 시원함은 사진으로 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 용추폭포

마지막으로 도착한 용추폭포는 가장 붐비는 곳이었습니다. 좁은 데크 위에 수십 명이 서 있었지만, 그 소란함조차 폭포 소리 아래에서는 묘하게 잦아들더군요.
거대한 바위 협곡 사이로 물줄기가 떨어지는 풍경은 용연폭포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수직으로 깎인 바위벽 사이 좁은 틈으로 떨어지는 물은 마치 용이 승천하는 듯한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최고의 촬영 지점을 찾아 자리를 잡았고, 사람들의 얘깃소리와 물소리가 뒤섞여 협곡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주왕산에서 만난 마지막 폭포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기억에 남았습니다.
🏯 다시 대전사로

하산을 마치고 대전사 앞에 섰을 때, 하늘은 아침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회색 구름은 사라지고, 짙은 파란 하늘 아래로 산의 능선이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오전의 흐림이 거짓말처럼 느껴졌죠.
주왕산의 기암괴석들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또렷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올라갈 때는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바위들이 이제는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대전사 마당에는 산행을 마친 등산객들이 모여 저마다의 방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사진을 찍고, 어떤 이는 그저 바위산을 바라보며 쉬고 있었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의 주왕산은 그 자체로 ‘하루의 변주’ 같았습니다. 구름 속에서 시작해 빛 속으로 내려온 여정. 같은 산이지만 시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여준 하루였습니다.
🌿 마무리
주왕산에서 보낸 하루는 단순한 산행이 아니었습니다. 아침엔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듯하다가, 오후엔 빛으로 덮인 산을 내려왔습니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하늘의 표정이 바뀌는 걸 보면, 산은 언제나 기다림의 예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Leica M10-R의 뷰파인더로 본 주왕산은 빛보다도 공기의 결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진으로 남긴 것은 구름과 바위의 형태였지만, 실제로 기억에 남은 건 그 시간의 온도와 냄새였습니다.
하산 후 마지막으로 돌아본 대전사는 파란 하늘 아래 유난히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그 순간, 오늘 하루의 모든 장면이 한 줄로 정리되는 기분이었습니다.
빛과 구름, 그리고 사람의 발걸음이 함께 만든 가을의 하루였습니다.
